필리베르트 치라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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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인으로, 1959년부터 1972년까지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프랑스 유학 이후 사회민주당(PSD)을 창당하여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며 안정적인 통치를 추구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야당 탄압으로 인해 1972년 학생 시위와 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197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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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필리베르 치라나나 |
| 출생일 | 1912년 10월 18일 |
| 출생지 |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앙바리코라노 |
| 사망일 | 1978년 4월 16일 |
| 사망지 | 안타나나리보,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 |
| 배우자 | 쥐스틴 치라나나 (1933년 결혼) |
| 종교 | (정보 없음) |
| 직업 | 프랑스어 및 수학 교수 |
| 경력 | |
|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 재임 시작: 1959년 5월 1일 재임 종료: 1972년 10월 11일 이전: 직책 신설 이후: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
| 마다가스카르 자치 평의회 의장/총리 | 재임 시작: 1958년 10월 14일 재임 종료: 1959년 5월 1일 이전: 라스anjy (1896–1897) (자리 재건) 이후: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1972–1975) (1959년부터 1972년까지 자리 폐지) |
| 프랑스 국민 의회 의원 | 재임 시작: 1956년 1월 19일 재임 종료: 1959년 7월 15일 |
| 부통령 | 필리베르 라온드리 칼빈 치에보 앙드레 레삼파 자크 라베마난자라 빅토르 미아다나 알프레드 라망가소아비나 유진 르챗 |
| 소속 정당 | |
| 정당 | (마다가스카르 피억압자당 →) 마다가스카르 사회민주당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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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
| 훈장 | [[File:MDG National Order - Grand Cordon BAR.png|60px]] File:PHL Order of Sikatuna - Grand Cross BAR.png File:ROK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 Order of the Republic of Korea.png |
2. 어린 시절 (1910년 ~ 1955년)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는 1912년 10월 18일 마다가스카르 북동부 암바리코라노에서 치미헤이족 출신 가톨릭 목축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174][175][176][177] 192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동생의 제안으로 안자만기라나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178]
뛰어난 학생이었던 치라나나는 1926년 알랄라바 지역 학교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179] 1930년에는 타나나리브에 있는 르 미레 드 빌러스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다.[179]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942년에는 타나나리브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았다. 1945년 교원 보조 경쟁 시험에 합격하여 지역 학교 교수로 재직할 수 있게 되었다.[176] 1946년, 프랑스 몽펠리에에 있는 에콜 노르말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고 교사 보조로 일했으며, 11월 6일 마다가스카르를 떠났다.[180]
1943년, 치라나나는 전문 교원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1944년에는 노동총동맹(CGT)에 들어갔다.[6] 제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연합이 창설되면서 마다가스카르의 식민 사회는 자유화되었고, 식민지 주민들은 정치적으로 조직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치라나나는 1946년 1월 마다가스카르 학생 공산주의자 그룹(GEC)에 가입해 재무 역할을 맡았고,[3][6] 이후 PADESM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3]
PADESM은 해안 지역 출신으로 구성된 정치 조직으로, MDRM과의 협정이 지켜지지 않자 "메리나 통제"의 회귀를 우려하여 MDRM의 민족주의적 목표에 반대하고 마다가스카르 독립에 반대하기 위해 창설되었다.[3]
1946년 7월, 치라나나는 몽펠리에의 에콜 노르말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PADESM 사무총장직을 거절했다.[11] 그는 "Tsimihety"라는 필명으로 PADESM 저널 ''Voromahery''에 기고했다.[11][12] 프랑스 여행으로 1947년 말라가시 봉기를 피할 수 있었던 치라나나는 프랑스에서 교육 분야의 편견을 인식하고, 해안 지역과 고원 지역 간 문화적 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3]
치라나나는 PADESM 활동을 재개하며 당의 좌익 개혁을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다.[3] 1951년, ''Varomahery''에 해안 지역 주민과 메리나족 간의 화해를 촉구하는 기사를 게재하고,[14] ''Ny Antsika''에 말라가시 엘리트들에게 "단일 부족을 형성"하라는 호소를 발표했다.[3] 1952년, 마준가 제3지구의 지방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15] 마다가스카르 대표자 회의 의원직도 겸했다.[15] 같은 해, 사회적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말라가시 행동에 참여했다.[22]
2. 1. 목축업자에서 선생님으로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는 1912년 10월 18일 마다가스카르 북동부 소피아구 암바리코라노에서 치미헤이족 출신 가톨릭 목축업자인 마디오마나나와 치라나나나 사이에서 태어났다.[174][175][176][177] 그는 목축업자가 될 운명이었으나, 192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동생 자마니삼보의 제안으로 안자만기라나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178]
뛰어난 학생이었던 치라나나는 1926년 알랄라바 지역 학교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179] 1930년에는 타나나리브에 있는 르 미레 드 빌러스 사범대학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었다.[179]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942년에는 타나나리브에서 중학교 교편을 잡았다. 1945년 교원 보조 경쟁 시험에 합격하여 지역 학교 교수로 재직할 수 있게 되었다.[176] 1946년, 프랑스 몽펠리에에 있는 에콜 노르말 학원에서 장학금을 받고 교사 보조로 일했으며, 11월 6일 마다가스카르를 떠났다.[180]
2. 2. 공산주의에서 PADESM으로
1943년,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는 전문 교원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1944년에는 노동총동맹(CGT)에 들어갔다.[6]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제4공화국에 의해 프랑스 연합이 창설되면서 마다가스카르의 식민 사회는 자유화되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이제 정치적으로 조직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치라나나는 그의 멘토 폴 랄라이보아비의 조언에 따라 1946년 1월 마다가스카르 학생 공산주의자 그룹(GEC)에 가입해 재무 역할을 맡았다.[3][6] GEC는 그가 1946년 6월에 창립 멤버가 된 PADESM (마다가스카르 소외자당)의 미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3]PADESM은 주로 Mainty프랑스어와 해안 지역 출신의 Tanindrana프랑스어로 구성된 정치 조직이었다. PADESM은 1945년과 1946년 프랑스 제헌 선거의 결과로 생겨났다. 마다가스카르 국민들은 처음으로 프랑스 선거에 참여하여 정착민과 원주민을 프랑스 국민 의회에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3] 마다가스카르 원주민에게 할당된 두 자리 중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해안 지역 주민들은 고지대 출신의 메리나가 통제하는 MDRM과 협정을 맺었다.[3][8] 해안 주민들은 서부에서 폴 랄라이보아비를 선출하는 데 동의했고,[3] 동부는 메리나 후보인 조셉 라보아항기에 맡겼다.[9] 이 협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메리나 조셉 라세타가 1945년 10월과 1946년 6월에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3] "메리나 통제"의 회귀를 우려하여 해안 주민들은 MDRM의 민족주의적 목표에 반대하고 마다가스카르 독립에 반대하기 위해 PADESM을 창설했다.
1946년 7월, 치라나나는 몽펠리에의 에콜 노르말(École normale)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PADESM 사무총장직을 거절했다.[11] 치라나나는 "Tsimihety"(출생지에서 유래)라는 필명으로 작성된 PADESM의 저널 ''Voromahery''에 기고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1][12]
2. 3. 프랑스에서의 시기

프랑스 여행으로 치라나나는 1947년 말라가시 봉기와 그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피할 수 있었다.[11] 이 사건들에 감명받은 치라나나는 1949년 2월 21일 몽펠리에에서 반 식민주의 시위에 참여했지만, 독립 지지자는 아니었다.[7]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치라나나는 교육에서 말라가시 엘리트에 대한 편견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에 있는 198명의 말라가시 학생 중 단 17명만이 해안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3] 그는 해안 지역 사람들과 고원 지역 사람들 사이에 문화적 격차가 존재하는 한, 모든 말라가시인들 간의 자유로운 연합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3] 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그는 마다가스카르에 해안 말라가시 학생 협회(AEMC, 1949년 8월)와 해안 말라가시 지식인 문화 협회(ACIMCO, 1951년 9월), 두 개의 조직을 설립했다. 이 조직들은 메리나족의 반감을 샀고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3]
2. 4. 진보주의적 야망

치라나나는 PADESM 활동을 재개하며 당의 좌익 개혁을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다.[3] 그는 운영 위원회가 행정부에 매우 불충실하다고 여겼다.[13] 1951년 4월 24일, ''Varomahery''에 "Mba Hiraisantsika"(우리에게 단결을)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기사에서 다가오는 입법 선거를 앞두고 해안 지역 주민과 메리나족 간의 화해를 촉구했다.[14] 10월에는 그가 창간한 격주간지 ''Ny Antsika''("우리의 것")에 말라가시 엘리트들에게 "단일 부족을 형성"하라는 호소를 발표했다.[3] 이러한 단결 호소에는 1951년 입법 선거에 서부 해안 후보로 참여하고자 했던 치라나나의 정치적 계획이 숨겨져 있었다.[15] 그러나 이 전술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해안 지역 정치계에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켜 실패했고,[14] 결국 "온건파" 라벨로손-마하삼포에게 후보직을 양보해야 했다.[16][15]
1952년 3월 30일, 치라나나는 "사회 진보" 명단으로 마준가 제3지구의 지방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15] 마다가스카르 대표자 회의 의원직도 겸했다.[15] 프랑스 정부 내 직책을 얻고자 했던 그는 1952년 5월 마다가스카르 영토 의회가 공화국 평의회의 상원 의원 5명을 선출하기 위해 조직한 선거에 출마했다.[15] 이 중 두 자리는 프랑스 시민에게 할당되었기 때문에,[17] 치라나나는 원주민에게 할당된 세 자리 중 한 자리에만 출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에르 라맘피,[18] 노르베르 자피마호바,[19] 라리자오나 라잉고에게 패했다.[15][20] 이 패배에 영향을 받은 치라나나는 행정부를 "인종 차별" 혐의로 고발했으며,[15] 다른 원주민 의원들과 함께 프랑스 총리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에게 단일 선거인단 설립을 제안했다.[21]
같은 해, 치라나나는 급진적 민족주의자와 현상 유지 지지자 사이의 "제3당"을 표방하며 평등과 정의를 통해 사회적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말라가시 행동에 참여했다.[22] 그는 PADESM의 해안적, 지역적 특성을 초월하여 전국적인 인지도를 구축하고자 했으며, 특히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 연합의 자유 국가가 되는 것을 넘어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했다.[3]
3. 권력 상승 (1956년 ~ 1958년)
1955년 프랑스를 방문한 치라나나는 1956년 1월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에 가입했다.[21] 그는 말라가시 국민 전선(FNM)과 앙드레 수카도 고등 판무관의 지원을 받아[3] 서부 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 330,915표 중 253,094표를 얻었다.[3]
부르봉 궁전에서 사회주의 그룹에 들어간[3] 치라나나는 1956년 3월 프랑스 연합을 비판하고 1896년 8월 병합법 폐지를 요구했다.[3] 같은 해 7월에는 1947년 봉기 관련 수감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화해를 촉구했다.[3]
프랑스와의 우호, 정치적 독립, 국민 통합 요구를 결합해 전국적 인지도를 얻은 그는,[3] 경제 및 사회 서비스 개선을 위한 분권화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공산당(PCF)과 타나나리베 민족주의자들은 그가 마다가스카르를 "발칸화"하려 한다고 비판했고,[3] 이는 그를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만들었다.[3] 1957년 2월, 그는 사유 재산 보호를 위해 가축 도둑 처벌 강화를 제안했다.[3]
1956년 12월 28일, 치라나나는 앙드레 레삼파 등과 함께 마준가에서 사회민주당(PSD)을 창당했다.[3][24] PSD는 데페르 기본법에 따른 식민 행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957년 3월 31일 지방 선거에서 "연합과 사회 진보" 명단으로 82,121표 중 79,991표를 얻어 재선된 치라나나는[25] 같은 해 4월 10일 마준가 지방 의회 의장이 되었다.[25] 이후 구성된 연립 정부에서 그는 부통령을, 앙드레 수카도는 명목상 대통령을 맡았다.[26]
권력을 잡은 후, 치라나나는 1957년 6월 툴레아르 주에 PSD 지부를 설립, 지방 의회 의원 16명을 영입하며 당세를 확장했다.[26][27] 1958년 4월, 제3차 PSD 당 대회에서 그는 데페르 기본법과 고등 판무관의 마다가스카르 정부 대통령직 겸임을 비판했다.[29] 같은 해 6월 샤를 드골 집권 후, 식민지 영토 계층 구조가 지역 정치인에게 유리하게 변경되면서, 1958년 8월 22일 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 행정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30]
3. 1. 프랑스 국회에서 마다가스카르 의원

1955년, 행정 업무차 프랑스를 방문한 치라나나는 1956년 1월 프랑스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에 가입했다.[21]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치라나나는 말라가시 국민 전선(FNM)과 고등 판무관 앙드레 수카도(André Soucadaux)의 지원을 받았다. 특히 수카도는 치라나나를 선거에 출마하는 민족주의자들 중 가장 합리적인 인물로 여겼다.[3] 이러한 지원과 지난 5년간 쌓아온 지지 덕분에,[23] 치라나나는 서부 지역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30,915표 중 253,094표를 얻었다.[3]
부르봉 궁전에서 치라나나는 사회주의 그룹에 합류했다.[3] 그는 솔직한 화법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으며, 1956년 3월에는 프랑스 연합을 야만적인 식민주의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이 모든 것은 단지 겉치레일 뿐이며,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3] 그는 도착하자마자 1896년 8월의 병합법 폐지를 요구했다.[3] 1956년 7월에는 화해를 촉구하며 1947년 봉기 관련 모든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3] 프랑스와의 우호, 정치적 독립, 국민 통합을 위한 요구를 결합함으로써 치라나나는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었다.[3]
국회의원으로서의 지위는 그의 지역 정치적 관심사를 보여줄 기회도 제공했다. 그는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북부와 북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개인적 거점에 대한 말라가시 영토 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했다.[3] 또한 경제 및 사회 서비스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분권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프랑스 공산당(PCF)의 일부 구성원들은 타나나리베의 열렬한 민족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그가 마다가스카르를 "발칸화"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3] 이로 인해 치라나나는 확고한 반공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3] 사유 재산에 대한 이러한 지지는 그가 유일하게 제출한 법안인 1957년 2월 20일 "가축 도둑에 대한 처벌 강화" 제안에서 드러났는데, 이는 프랑스 형법에서는 고려되지 않았다.[3]
3. 2. PSD 창당과 데페르 기본법
치라나나는 점차 해안 지역 사람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4] 1956년 12월 28일, 그는 앙드레 레삼파를 비롯한 PADESM의 좌파 인사들과 함께 마준가에서 사회민주당(PSD)을 창당했다.[3][24] 이 신생 정당은 프랑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FIO)에 가입했다.[24] PSD는 PADESM의 후계 정당과 다름없었지만, 독립을 지지하는 해안 지역의 농촌 귀족, 관료, 반공주의자들에게 동시에 호소했기 때문에 PADESM의 한계를 빠르게 넘어섰다.[1] 처음부터 PSD는 데페르 기본법에 따라 행정 권한을 이양하는 과정에 있던 식민 행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데페르 기본법의 발효는 1957년 지방 선거 이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1957년 3월 31일, 치라나나는 "연합과 사회 진보" 명단으로 82,121표 중 79,991표를 얻어 지방 의원으로 재선되었다.[25] 그는 명단의 대표였기 때문에 1957년 4월 10일 마준가 지방 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25] 3월 27일, 이 의회는 집행 위원회를 선출했다. 치라나나의 PSD는 대표 의회에서 9석만 차지했다.[27] 치라나나를 부통령으로, 고등 판무관 앙드레 수카도(André Soucadaux)를 명목상 대통령으로 하는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26] 치라나나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지지자인 앙드레 레삼파를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했다.[27]
권력을 잡은 후, 치라나나는 천천히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다. 1957년 6월 12일, PSD의 두 번째 지부가 툴레아르 주에 설립되었다.[26] 지방 의회의 16명의 의원이 이에 합류했고, PSD는 툴레아르를 장악했다.[27] 프랑스 연합에서 권력을 잡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치라나나는 의회의 부통령으로서 자신의 권한 제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28] 1958년 4월, 제3차 PSD 당 대회에서 치라나나는 데페르 기본법과 이 법이 의회에 부과한 이원적 성격,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정부의 대통령직을 고등 판무관이 맡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29] 1958년 6월 샤를 드골이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국가 정부 칙령에 따라 식민지 영토의 계층 구조가 지역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게 변경되었다.[30] 따라서 1958년 8월 22일, 치라나나는 공식적으로 마다가스카르 행정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30]
4.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프랑스 공동체 내, 1958년 ~ 1960년)
샤를 드골은 1958년 권력을 되찾은 후 프랑스 연합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면서, 프랑스와 옛 식민지 간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31] 이 위원회에서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프랑스-아프리카 "연방"을,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연합"을 제안했으나, 레몽 자노가 치라나나에게 제안한 "공동체" 개념이 채택되었다.[32]
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공동체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 투표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1958년 9월 28일에 실시된 투표 결과, 찬성 1,361,801표, 반대 391,166표로 압도적인 찬성을 얻어 가결되었다.[33] 이를 바탕으로 치라나나는 1896년의 합병 법률을 폐지했다.[33] 1958년 10월 14일, 치라나나는 지방 의원 회의에서 자치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 총리가 되었으며,[34] 다음 날 1896년의 합병 법률이 폐지되었다.[35]
1958년 10월 16일, 헌법 초안을 작성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치라나나가 이끄는 사회민주당(PSD)과 마다가스카르 민주사회연합(UDSM)은 국민투표에서 "반대" 투표를 주장한 정당들의 반대를 받지 않도록 선거 방식을 조정했다.[36] 이에 반발한 여러 정당은 마다가스카르 독립을 위한 의회당(AKFM)으로 합병되었으며, 리샤르 안드리야만자토 사제가 이끌었다.[37]
치라나나는 AKFM을 제압하기 위해 지방에 국가 기반 시설을 빠르게 구축하고, 국무장관을 임명했다.[37] 1959년 1월에는 디에고 수아레즈의 시의회를 해산하고,[37] 2월에는 "국가 및 공동체 기관에 대한 경멸죄"를 도입하는 법을 통과시켜 특정 출판물을 제재했다.[37]
1959년 5월 1일, 치라나나는 113표(기권 1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0]
4. 1. 프랑스-아프리카 공동체 추진
샤를 드골은 1958년 권력을 되찾은 후 탈식민지화 과정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연합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을 구상했다.[31] 드골은 1958년 7월 23일 아프리카 및 마다가스카르 정치인들을 포함한 자문위원회를 임명했고, 위원회는 프랑스와 옛 식민지 간의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31]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프랑스-아프리카 "연방"을,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는 "연합"을 제안했으나, 결국 프랑스 헌법 편집자 중 한 명인 레몽 자노가 치라나나에게 제안한 "공동체" 개념이 채택되었다.[32]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 사회민주주의 연합(UDSM)과 함께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공동체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 투표를 위한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 국민투표는 1958년 9월 28일에 실시되었다.[33] "반대" 캠페인은 마다가스카르 인민 연합(UPM)이 주도했다.[33] 투표 결과, "찬성"이 1,361,801표, "반대"가 391,166표로 나타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33] 이 결과를 바탕으로 치라나나는 1896년의 합병 법률을 폐지했다.[33] 1958년 10월 14일, 치라나나는 지방 의원 회의에서 자치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 총리가 되었으며,[34] 다음 날 1896년의 합병 법률이 폐지되었다.[35]
4. 2. 야당에 대한 정치적 책략
1958년 10월 16일, 의회는 각 지방에서 다수 일반 투표를 통해 헌법 초안을 작성할 9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36] 이 선거 방식은 치라나나가 이끄는 사회민주당(PSD)과 마다가스카르 민주사회연합(UDSM)이 국민투표에서 "반대" 투표를 주장한 정당들로부터 국회에서 어떠한 반대도 받지 않도록 보장했다.[36] 노르베르 자피마호바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이에 반발하여 UPM, FNM 및 농민 친구 협회는 10월 19일 마다가스카르 독립을 위한 의회당(AKFM)으로 합병되었으며, 리샤르 안드리야만자토 사제가 이끌었다.[37] 이 당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이었으며 정부에 대한 주요 반대 세력이 되었다.[37]
치라나나는 AKFM을 제압하기 위해 지방에 국가 기반 시설을 빠르게 구축했다.[37] 특히 그는 모든 지방에 국무장관을 임명했다.[37] 1959년 1월 27일,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디에고 수아레즈의 시의회를 해산했다.[37] 같은 해 2월 27일, 그는 "국가 및 공동체 기관에 대한 경멸죄"를 도입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이를 사용하여 특정 출판물을 제재했다.[37]
4. 3.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대통령 선출
1959년 5월 1일, 의회는 지방 의원과 동수의 지역 대표로 구성된 단체를 선출했는데, 이 단체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40] 필리베르 치라나나, 바실 라자핀드라코토, 프로스페 라조엘손, 모리스 퀴르메 등 4명의 후보가 지명되었다.[40] 결국, 치라나나는 113표(기권 1표)로 만장일치로 마다가스카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0]5. "은총의 상태" (1960년 ~ 1967년)
치라나나는 안정과 중용 정책으로 국가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1] 독립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1960년 7월 20일, 1947년 반란 이후 프랑스에 있던 조셉 라보아항기, 조셉 라세타, 자크 라베마난자라를 마다가스카르로 불러들였다.[48] 이는 대중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49] 치라나나는 이들을 자신의 두 번째 정부에 참여시켰고, 라보아항기는 보건부 장관, 라베마난자라는 경제부 장관이 되었다.[50] 그러나 라세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AFKM에 합류했다.[51]
치라나나는 자신이 서방 세계의 일원임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자유 세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이 인간과 국가의 자유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서방 세계의 일원입니다.[52]
치라나나 행정부는 인권 존중을 위해 노력했으며, 언론과 사법 시스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53] 1959년 헌법은 정치적 다원주의를 보장했다.[39] 극좌 세력도 정치 조직 결성의 권리를 가졌다. 몬자 자오나가 이끄는 마다가스카르 독립 민족 운동(MONIMA)은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했고, AKFM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지했다.[39] 치라나나는 일당제 국가를 거부하며 야당의 존재를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이것에 대해 너무 민주적입니다. 일당제 국가는 항상 독재로 이어집니다. 우리 PSD는 우리 당의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사회 민주주의자이며, 이러한 종류의 당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거부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쉽게 이를 제정할 수 있지만, 야당이 존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54]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 노동조합, 학생 및 여성 단체 등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39]
하지만 치라나나의 "민주주의"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요 도시 외 지역에서는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53]
5. 1. 야당 거점 무력화
1959년 10월, 시의원 선거에서 AKFM은 수도 안타나나리보(리샤르 앙드리마냐토)와 디에고 수아레즈(프랑시스 소트롱)만을 장악했다.[55] MONIMA는 툴레아르(몽자 자오나) 시장직[56]과 안치라베 시장직(에밀 라사카이자)을 차지했다.치라나나 정부는 교묘한 정치적 술책으로 이 시장직들을 하나씩 장악했다. 1960년 8월 24일 법령 제60.085호에 따라 "안타나나리보 시의 행정은 내무부 장관이 선택하고 '총괄 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관료에게 위임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이 관료는 리샤르 앙드리마냐토 시장의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57]
1961년 3월 1일, 치라나나는 몽자 자오나를 툴레아르 시장직에서 "사임"시켰다.[56] 1963년 7월 15일 법은 "시장과 제1보좌관의 직무는 프랑스 시민이 수행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여, 프랑시스 소트롱이 1964년 12월 시의원 선거에서 디에고 수아레즈 시장으로 재출마하는 것을 막았다.[58]
해당 시의원 선거에서 PSD는 안치라베 시의회 의석 36석 중 14석을 차지했고, AKFM은 14석, MONIMA는 8석을 차지했다.[59] 두 정당의 연합으로 AKFM의 지역 지도자 블레이즈 라코토마보가 시장이 되었다.[59] 몇 달 후, 내무부 장관 앙드레 레삼파는 이 도시를 통치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시의회를 해산했다.[59] 1965년에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고, PSD가 승리했다.[59]
5. 2. 의회 야당 용인
1961년 10월, "안치라베 회의"에서 치라나나는 당시 33개였던 섬의 정당 수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62] 이후 사회민주당(PSD)은 동맹 세력을 흡수하여 국회에서 104명의 의원을 확보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평등한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한쪽은 사실상 일당 독재와 같았던 사회민주당이었고, 다른 한쪽은 치라나나가 의회에서 용인한 유일한 야당인 AKFM이었다. 이러한 야당의 입지는 1965년 8월 8일의 입법 선거에서 굳어졌다. 사회민주당은 전국 투표의 94% (2304000표)를 얻어 104명의 의원을 유지했고, AKFM은 투표의 3.4% (145000표)를 얻어 3석을 차지했다.[63] 치라나나에 따르면, 야당의 약세는 그들이 "말은 많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반면에 사회민주당은 조직적이고, 규율이 있으며, 노동 계급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64]5. 3. 대통령 선거 (1965년)
1962년 6월 16일, 제도적 법률은 보통 직접 선거에 의한 공화국 대통령 선출 규칙을 제정했다.[61] 1965년 2월, 치라나나는 7년 임기를 1년 앞당겨 종료하기로 결정하고 1965년 3월 30일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65] 1963년 AKFM을 탈당하여 자신의 정당인 국민 마다가스카르 연합(FIPIMA)을 창당한 조셉 라세타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51] 무소속인 알프레드 라자피아리소아도 출마했다.[66] MONIMA의 지도자 몬자 자오나는 잠시 출마 의사를 밝혔지만,[66] AKFM은 치라나나에 맞서 야당 후보를 한 명만 내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67] 이후 AKFM은 은밀하게 치라나나를 지지했다.[51]치라나나의 선거 운동은 섬 전체를 아우른 반면, 그의 경쟁자들은 자금 부족으로 인해 지역적인 범위에 머물렀다.[68] 1965년 3월 30일, 2,521,216표가 투표되었고 (총 유권자 수는 2,583,051명이었다).[69] 치라나나는 총 2,451,441표, 즉 97%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69] 조셉 라세타는 54,814표를, 알프레드 라자피아리소아는 812표를 얻었다.[69]
5. 4. "마다가스카르 사회주의"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대통령은 독립과 함께 새로운 제도를 확립하면서 사회주의 실현을 국가적 목표로 설정했다. 그가 고안한 "마다가스카르 사회주의"는 국가에 적합한 경제적, 사회적 해결책을 제공하여 개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용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시도였다.[70]
1962년 4월 25일과 27일, 치라나나는 타나나리브에서 "마다가스카르 개발의 날"을 개최하여 국가 경제 상황을 분석했다.[71] 이 감사를 통해 마다가스카르의 통신망이 매우 부족하고, 물과 전기 접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39] 1960년 당시 550만 명의 인구 중 89%가 시골에 거주하여 인구 밀도는 낮았지만,[72] 농업 자원은 풍부했다.[39] 제3세계 대부분의 국가처럼, 마다가스카르도 연평균 3.7%의 농업 생산량 증가율에 근접하는 인구 증가를 겪고 있었다.[71]
이에 따라 경제부 장관 자크 라베마난자라에게는 세 가지 주요 목표가 주어졌다. 첫째, 마다가스카르 경제를 다변화하여 1969년에 2,000만 달러를 넘어선 수입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었다.[73] 둘째, 무역 수지 적자(600만 달러)를 줄여[72] 마다가스카르의 경제적 독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73] 셋째, 인구의 구매력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는데, 1960년 1인당 국민 총생산(GNP)은 연간 101달러 미만이었다.[72]
치라나나 행정부의 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포함하여, (국내 및 외국) 민간 투자와 국가 개입을 함께 장려했다.[39] 1964년에는 농업 개발과 농민 지원에 중점을 둔 5개년 계획이 채택되었다.[76] 이 계획 실현을 위해 민간 부문은 550억 마다가스카르 프랑을 투자할 것으로 예상되었다.[75] 정부는 마다가스카르 발행 기관, 국고, 마다가스카르 국립 은행, 국립 투자 회사 등 네 개의 기관을 통해 대출 제도를 마련하여 이러한 투자를 장려했다.[73] 치라나나는 외국 자본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국유화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는 마다가스카르에 재투자되지 않은 상업적 이익에 대해 50%의 세금을 부과했다.[78]
5. 4. 1. 협동조합과 국가 개입
치라나나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정부는 협동조합과 기타 자발적 참여 방식을 장려했다.[86]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농업 개발의 핵심으로 조사되었다.[78] 1962년, 생산 및 상업 활동에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담당하는 협동조합 총국이 창설되었다.[79] 1970년, 협동조합 부문은 바닐라 수확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다.[79] 또한 바나나의 수확, 가공, 수출을 완전히 통제했고, 커피, 정향, 쌀 재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79] SOMALAC (알라오트라 호수 관리 회사)와 같은 혼합 경제 사회에 의해 대규모 관개 계획이 수행되었으며, 5,000명 이상의 쌀 농부를 지원했다.[79]개발의 주요 장애물은 토지 개발에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현장"에서 소규모 작업을 fokon'olona|포코놀로나프랑스어 (프랑스의 코뮌에 해당하는 최하위 마다가스카르 행정 구역)에 위임했다.[39] 포코놀로나는 지역 개발 계획의 틀 내에서 농촌 기반 시설과 소규모 댐을 건설할 권리가 있었다. 이러한 작업에서 그들은 국가 재조림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헌병대와 시민 봉사의 도움을 받았다.[80] 1960년에 무위도식을 막기 위해 설립된[81] 시민 봉사는 마다가스카르 청년들이 일반 교육과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82]
5. 4. 2. 개발의 원동력으로서의 교육
문맹 퇴치를 위한 노력이 농촌 인구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시민 봉사단의 젊은 징집병들이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48] 초등 교육은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에서 가능했다.[48] 1960년에 교육 지출은 을 초과했으며, 1970년에는 이상으로 증가하여 GDP의 5.8%에서 9.0%로 상승했다.[83] 이는 초등학교 학생 수를 45만 명에서 거의 백만 명으로 두 배로 늘리고, 중등학교 학생 수를 26,000명에서 108,000명으로 네 배로 늘렸으며, 고등 교육 학생 수를 1,100명에서 7,000명으로 여섯 배로 늘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84] 모든 주에 리세가 개설되었으며,[48] 1961년 10월에는 타나나리브 고등 연구 센터가 마다가스카르 대학교로 전환되었다.[85] 이처럼 교육이 증가함에 따라 치라나나는 여러 마다가스카르 기술 및 행정 그룹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86]5. 4. 3. 경제적 성과 (1960년 ~ 1972년)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민간 부문 투자는 예상보다 저조했지만, 2차 부문에서는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75] 산업 생산량은 1960년 에서 1971년 으로 증가했지만, 여전히 초기 단계였다.[86] 가공 부문이 가장 크게 성장하여 쌀 공장, 전분 제조업체, 제유소, 설탕 정제소, 통조림 공장 등이 개발되었다.[86]안치라베의 면 공장은 생산량을 2100ton에서 18700ton으로 늘렸고,[88] 마다가스카르 제지 공장(PAPMAD)이 안타나나리보에 설립되었다.[87] 항구 도시 투아마시나에는 정유 공장이 건설되었다.[87] 이러한 발전으로 산업 부문에서 3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었다.[87]
반면, 1차 부문에서는 민간 부문의 움직임이 적었다.[75] 통신망은 여전히 부적절하여, 안타나나리보-투아마시나(알라오트라 호 연결 지선 포함), 안타나나리보-안치라베, 피아나란초아-마나카라의 세 개 철도 노선만 있었다.[86] 3800km의 도로(이 중 2560km는 아스팔트 포장)는 주로 안타나나리보를 항구 도시와 연결하는 데 사용되었고, 광대한 지역은 고립된 상태였다.[86]
말라가시 농업은 치라나나 정권 하에서 본질적으로 자급자족 형태로 유지되었다. 쌀 생산량은 1960년 1200000ton에서 1971년 1870000ton으로 증가했고,[90] 식량 자급자족은 거의 달성되었다.[90] 매년 15,000~20,000톤의 고급 쌀이 수출되었다.[88] 마다가스카르는 커피 수출량을 1962년 56000ton에서 1971년 73000ton으로, 바나나 수출량은 연간 15000ton에서 20000ton으로 늘렸다.[88] 이 섬은 세계 최대의 바닐라 생산국이었다.[86]
그러나 극적인 경제 성장은 없었다. 1인당 국민 총생산(GNP)은 9년 동안 30달러만 증가하여 1969년에는 131달러였다.[72] 수입이 증가하여 무역 적자가 발생했다.[72] 몇몇 발전소는 안타나나리보, 투아마시나, 피아나란초아에만 전력을 공급했다.[86] 1인당 연간 에너지 소비량은 소폭 증가에 그쳤다.[72]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연간 4.1% 증가했고,[87] 대외 부채는 적었다.[87] 1970년 외환 보유액은 였다.[87] 낮은 인구와 많은 소의 수는 기근의 위험을 줄였다.[86] 야당 지도자 안드리아마냐토는 치라나나의 경제 정책에 "80% 동의"한다고 밝혔다.[39]
5. 5. 프랑스와의 특권적 파트너십
치라나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마다가스카르와 프랑스 간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게 유지되었다. 치라나나는 섬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을 마다가스카르의 19번째 부족으로 여긴다고 할 정도였다.[91]치라나나는 폴 룰로(내각을 이끌며 모든 경제 문제에 관여), 보키노 장군(국방 참모총장으로 사실상 국방부 장관 역할 수행) 등 프랑스 기술 고문 ("바자")들의 자문을 받았다.[92]
1963/1964년까지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관리들은 행정 기구 운영을 보장했다.[93] 이후 이들은 자문 역할로 축소되었고, 대부분 영향력을 잃었다.[93]
국가 안보는 프랑스 군대의 책임이었으며, 프랑스 군은 섬의 여러 전략적 기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프랑스 공수부대는 이바토-타나나리브 국제공항에, 인도양 주둔 프랑스 군 사령관은 디에고 수아렉스 항구에 주둔했다.[94] 1964년 1월 프랑스 정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약 1,200명의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하자,[95] 치라나나는 불만을 표시했다.
독립 후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존에 속해 있었다.[94] 프랑-존 가입을 통해 마다가스카르는 외환 보장, 특정 농산물에 대한 보장된 시장, 사적 투자 확보, 국가 예산의 안정성 유지 등의 혜택을 얻었다.[97] 1960년에 수출의 73%가 프랑-존으로 향했고,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 경제에 을 공급하는 주요 무역 파트너였다.[71]
프랑스는 12년 동안 4억달러에 달하는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다.[98] 1964년까지 이러한 지원은 마다가스카르 국가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했다.[99] 유럽 경제 공동체 (EEC)와의 연합 협약 덕분에, 프랑-존의 시장 기구, 지원 기금 및 프랑스 협력(FAC)에서 발생하는 이점이 공동체 수준으로 이전되었다.[98] 마다가스카르는 1965년에서 1971년 사이에 EEC로부터 약 1.6억달러의 지원을 받았다.[98]
이러한 재정적 의존 외에도, 치라나나의 마다가스카르는 경제에서 프랑스의 지배적인 역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100] 은행, 보험사, 대규모 상업, 산업 및 일부 농업 생산(설탕, 사이잘 삼, 담배, 면화 등)은 외국 소수 민족의 통제하에 있었다.[100]
5. 6. 외교 정책
필리베르 치라나나는 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마다가스카르가 구 식민 모국에 완전히 헌신하고 신식민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인상을 주었다.[39] 그러나 치라나나는 프랑스의 경제적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이념을 공유하는 다른 국가들과 외교 및 상업적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86]- 서독: 1960년에 약 상당의 마다가스카르 제품을 수입했다.[71] 1962년 9월 21일 마다가스카르와 경제 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의 신용을 제공했다.[101] 또한, 1965년에 설립되어 사회민주당(PSD)을 위한 정치 및 행정 인력을 양성하는 임무를 맡은 필리베르 치라나나 재단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78]
- 미국: 1960년에 약 상당의 마다가스카르 제품을 수입했으며,[71]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을 지원했다.[102]
- 대만: 1962년 4월 섬을 방문한 후 관계를 지속하려 했다.[103]
공산주의 블록과 말라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포함한 남부 아프리카를 향한 상업적 접근 시도가 있었으나, 이러한 절충주의는, 특히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86]


치라나나는 국제 연합,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아프리카 말라가시 연합(AMU)과 같은 국제 기구에서 중용과 현실주의를 옹호했다.[39] 그는 콰메 은크루마가 제안한 범아프리카주의 사상에 반대하며, 경제 분야에서는 아프리카와 협력하되 정치 무대에서는 협력하지 않으려고 했다.[104] 1964년 7월 19일 카이로에서 열린 OAU 제2차 정상 회담에서 그는 이 기구가 "수다", "선동", "복잡성"이라는 세 가지 질병으로 약화되었다고 선언했다.[105]
그는 1961년 3월 6일부터 13일까지 콩고 위기의 여러 교전국들이 분쟁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타나나리브에서 원탁 회의를 조직하여 중재자 역할을 했다.[106] 콩고 공화국을 조제프 카사부부가 이끄는 연방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으나, 곧 분쟁이 재개되어 중재는 헛수고였다.[106]
치라나나는 온건해 보였지만 심각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1965년 10월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대통령이 아크라에서 개최한 OAU 제3차 회의를 보이콧했다.[107] 1965년 11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하며 "쿠데타는 항상 공산주의 중국의 흔적을 남긴다"고 단언했다.[108] 1966년 1월 5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생 실베스트르 쿠데타 이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을 칭찬했다.[109]
6. 정권의 쇠퇴와 몰락 (1967년 ~ 1972년)
1967년부터 치라나나는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말라가시 사회주의"를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 마련한 구조들이 거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명확해졌고[110], 미니스커트 금지령과 같이 인기가 없는 조치들도 있었다.[111]
1968년 11월, 프랑스 기술 지원가와 마다가스카르인이 작성한 ''공화국 10년''(Dix années de République)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출판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사회민주당(PSD) 지도자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정부 구성원들의 탓으로 돌린 몇몇 금융 스캔들을 폭로했다.[112] 조사가 시작되어 저자 중 한 명이 투옥되는 결과를 낳았고, 지식인들은 이 사건에 격분했다.[112]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권의 쇠퇴는 억제되었지만, 명확한 반대 흐름을 만들어냈다.
6. 1. 프랑스 친화 정책에 대한 도전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메리나족과 해안 마다가스카르족은 정치적 독립은 달성되었지만 경제적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다.[100] 프랑스는 경제를 통제했고, 마다가스카르 고위 공무원직의 기술직을 거의 독점했다.[94] 프랑스-마다가스카르 협정의 개정과 상당한 국유화는 많은 마다가스카르인들에게 당시 유럽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5천에서 1만 개의 일자리를 현지인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다.[97]또 다른 반대의 중심에는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통화권 가입이 있었다. 당시 여론은 마다가스카르가 이 통화권에 남아있는 한 프랑스 은행의 자회사와 지점만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사업을 할 것이라고 봤다.[97] 이 은행들은 마다가스카르 기업 설립을 지원하는 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고, 충분하지 않은 보증을 핑계로 삼았다.[97] 또한 마다가스카르인들은 프랑스인에 비해 신용 대출 접근이 제한되었으며, 프랑스인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졌다.[97] 마지막으로, 프랑스 통화권 가입은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정기적인 제한을 수반했다.[97]
1963년 제8차 PSD 의회에서 집권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프랑스-마다가스카르 협정 개정 가능성을 제기했다.[113] 1967년 제11차 의회에서는 사실상 개정을 요구했다.[114] 정권의 실세인 앙드레 레삼파가 이를 주창했다.[114]
6. 2. 치라나나의 질병
치라나나는 심혈관 질환을 앓았다. 1966년 6월,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2개월 반 동안 요양해야 했으며,[115] 3주 동안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에서 시간을 보냈다.[116] 공식적으로, 치라나나의 병은 단순한 피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7] 이후, 치라나나는 검진을 위해 자주 파리를 방문했고 휴식을 위해 프랑스 리비에라를 찾았다.[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다.[119]
한동안 부재했던 치라나나는 1969년 말에 자신의 권위와 정부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했다. 그는 12월 2일, 모두를 놀라게 하며, 불신임 결의 없이도 헌법에 어긋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해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20] 2주 후, 그는 두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전과 동일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120] 1970년 1월, 그가 다시 프랑스에 부재했을 때, 그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자크 포카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라나나는 야운데로 가서 OCAM 회의에 참여했다. 1970년 1월 28일 카메룬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심장마비를 겪었고, 피티에-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특별기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122] 대통령은 열흘 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지만, 깨어났을 때 거의 모든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을 유지했다.[123] 그는 1970년 5월 14일까지 병원에 입원했다.[124] 이 3개월 반 동안, 그는 4월 8일,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길에 있던 야당 대표 리샤르 앙드리안자토를 포함하여 수많은 프랑스 및 마다가스카르 정치인들의 방문을 받았다.[125]
5월 24일, 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왔다.[124] 1970년 12월, 그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했다고 판단하여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126] 그러나 그의 정치적 쇠퇴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를 둘러싼 개인 숭배에 의해 부추겨진 치라나나는 권위주의적이고 짜증을 잘 내게 되었다.[1] 그는 때때로 신의 지원을 주장했다.
사실, 사리사욕을 채우는 측근들에 의해 현실과 단절된 그는 사회 경제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
6. 3. 후계자 갈등
1964년, 필리베르트 치라나나의 후계자 경쟁이 시작되었다.[128] PSD 내에서는 자크 라베마난자라를 중심으로 한 온건, 자유주의, 기독교적 세력과 앙드레 레삼파가 대표하는 진보적 경향의 세력 간에 갈등이 있었다.[94]1968년, 내무부 장관 앙드레 레삼파가 치라나나의 후계자로 보였다.[135] 그러나 1970년 1월, 치라나나가 응급 입원하면서, 자크 라베마난자라, 알프레드 나니, 부통령 칼뱅 치에보 등이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었다.[136] 특히 칼뱅 치에보는 자크 포카르의 지지를 받았다.[121]
1970년, 치라나나가 권력을 되찾은 후, 4명의 부통령을 임명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86] 레삼파는 제1 부통령이 되었으나, 치에보는 부차적인 역할로 밀려났다.[137]
그러나 치라나나와 레삼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레삼파는 프랑코-마다가스카르 협정 철폐를 지지하며 1970년 11월 7일 PSD 전국 평의회에서 협정 개정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26] 치라나나는 레삼파가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믿고, 1971년 2월 17일 정부를 해산, 레삼파는 내무부 장관직을 잃었고, 치라나나가 직접 내무부를 장악했으며, 치에보가 제1 부통령이 되었다.[140]
1971년 6월 1일, 앙드레 레삼파는 국무회의의 지시에 따라 체포되어 미국 정부와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생트마리 섬에서 가택 연금되었다.[142] 몇 년 후, 치라나나는 이 음모가 조작된 것이라고 자백했다.[4]
6. 4. 로타카
1970년 9월 6일 총선에서 사회민주당(PSD)은 104석을, 마다가스카르 독립회의당(AKFM)은 3석을 얻었다.[143] 야당은 선거 과정에 대해 약 600건의 불만을 제기했지만, எதுவும் 조사되지 않았다.[144] 1972년 1월 30일 대통령 선거에서 치라나나는 99.72%의 득표율로 재선되었다.[145][146] 선거 기간 동안 일부 언론인의 재산이 압수되었고, 투표 결과와 승리 방법, 유권자에게 가해진 위협과 압력을 비판하는 출판물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146]선거에서 패배를 확신한 야당은 거리로 나섰으며[53], 이들은 치라나나와 레삼파가 의사 결정에서 소외시킨 메리나 엘리트의 지지를 받았다.[128]
6. 4. 1. 농민 시위
1971년 3월 31일과 4월 1일 밤, 마다가스카르 남부, 특히 툴리아라시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41] 몽자 자오나가 이끄는 반군은 남동부의 목장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PSD 정당에 과중한 세금과 터무니없는 의무 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다.[147] 이 지역은 특히 가난했으며, 가뭄과 사이클론으로 인해 자주 고통을 받아 오랫동안 지원을 기다려왔다.[141] 따라서 MONIMA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관공서를 점거하고 약탈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141]
반란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진압되었다.[148] 공식 사망자 수는 45명이었지만 자오나는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148] 자오나는 체포되었고 그의 정당은 금지되었다.[148]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헌병대(사령관 리샤르 라치만드라바 대령은 나중에 1975년 6일 동안 대통령을 지냈지만 암살당했다)의 징수는 전국적으로 "PSD 국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147] 치라나나는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한 일부 강경파 관리들의 행동을 비판했으며,[148] 반란 이후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에게서 돈과 가축을 학대하고 갈취한 관리들도 비난했다.[148]
6. 4. 2. 마다가스카르의 5월
1972년 4월, 의대생 협회가 해산되자 수도의 대학과 고등학교는 4월 24일부터 새로운 시위에 돌입했다.[149]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 회담이 열렸지만, 양측은 각자의 입장을 고수했다.[151] 시위는 확산되어 4월 28일 피아나란초아, 4월 29일 안치라베에까지 이르렀다.[152] 그 후 지방 도시의 중고등학생들이 "프랑스-마다가스카르 협정과 문화 제국주의의 범죄"를 규탄하며 대규모로 참여했다.[153]당국은 5월 12일 저녁 380명의 학생과 학생 지지자들을 체포하여 마다가스카르 북쪽에 있는 작은 섬인 Nosy Lava|노시 라바프랑스어의 교도소에 수감했다.[154] 다음 날, 약 5천 명의 학생들이 타나나리브에서 정권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공화국 보안군(FRS)은 시위대에 발포했지만,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155] 5월 13일의 공식 사망자는 FRS 대원 7명과 시위대 21명이었으며,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156]
이 폭력 사태로 수도의 대부분의 공무원과 많은 기업의 직원들이 업무를 중단하여 정부는 더욱 신뢰를 잃었다.[157] 5월 15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380명의 투옥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대통령궁으로 행진했고, 이 과정에서 FRS 대원 5명과 시위대 5명이 사망했다.[158] 헌병대는 민중 탄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군대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154] 결국 정부는 FRS 부대를 철수시키고 군대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158]
필리베르트 치라나나는 5월 16일, 380명의 수감자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다.[159] 그러나 치라나나의 권위는 점점 더 공개적으로 도전받았다.[160] 5월 17일, 프랑스 정부가 섬에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마다가스카르의 위기에 개입하지 않으며, 내부 위기"라고 발표하면서 야당의 세력이 강화되었다.[160]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데 실패한 치라나나는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국방부 장관을 총리로 임명하고, 그에게 완전한 대통령 권한을 부여했다.[154][161]
7. 권력 회복 노력 (1972년 ~ 1975년)
치라나나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대통령이었지만, 라마난초아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한 것을 임시 조치로 생각했다.[1] 1972년 5월 22일, 그는 자크 포카르에게 "나는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 나는 죽을 수도 있지만, 자진해서 물러나지 않겠다. 필요하다면 아내와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62]
그러나 1972년 5월 18일 이후, 그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163] 그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되었다.[163] 점차 치라나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1972년 7월 22일, 마준가로의 개인적인 여행 중 시위대는 그를 "우리는 당신에게 질렸다, 아빠", "PSD는 끝났다"와 같은 적대적인 현수막으로 맞이했다.[164] 치라나나는 또한 5월 시위 동안 마준가 중심에 있던 자신의 동상이 전복된 것을 보았다.[164] 1972년 10월 8일 헌법 국민투표에서 96.43%의 유권자가 라마난초아에게 5년간의 전권을 부여하는 것에 찬성하면서, 그는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 치라나나는 1972년 10월 11일에 공식적으로 퇴임했다.
자신을 "중단된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고 칭한 치라나나는 정치에서 은퇴하지 않고 군사 정권의 강력한 반대자가 되었다.[165] 라마난초아 장군은 그에게 정치적 결정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과 더 이상 기자들에게 발표할 권한이 없다고 알렸다.[165] 사회민주당(PSD)은 많은 주요 당원들이 체포되면서 사법적인 괴롭힘을 겪었다.[166] 1973년 10월 21일, 국민 개발 자문 위원회(CNPD)의 자문 선거에서 PSD는 선거 부정의 희생양이 되었다.[167] 군사 정권을 지지하는 후보들이 선출된 144석 중 130석을 차지했다.[167]
이 선거에서 치라나나는 1972년 5월에 석방되어 이후 마다가스카르 사회주의 연합(USM)을 설립한 그의 옛 장관 앙드레 레삼파와 화해했다.[167] 이 화해는 1974년 3월 10일, PSD와 USM의 합병으로 이어져 마다가스카르 사회주의당(PSM)이 되었으며, 치라나나가 대통령을, 레삼파가 사무총장을 맡았다.[168] PSM은 특히 "마다가스카르화"와 "사회화"와 관련된 식량 부족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연립 정부 구성을 촉구했다. 1975년 2월 3일의 각서에서, 치라나나는 90일 이내에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조직하기 위해 임시 정부를 구성할 잘 알려진 인물을 선택할 "원로 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했다.[169]
8. 말년과 죽음 (1975년 ~ 1978년)
라마난초아의 사임과 1975년 2월 5일 리샤르 라치만드라바가 국가 원수로 즉위한 후, 치라나나는 정치 생활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170] 그러나 6일 후인 1975년 2월 11일, 라치만드라바는 암살당했다. 특별 군사 재판소는 "세기의 재판"을 진행했다.[1] 기소된 296명 중에는 치라나나도 있었는데, 그는 8명의 군 수뇌부로부터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인 리샤르 라치만드라바 대령 암살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171] 결국 치라나나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1]
재판 이후, 치라나나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172] 그는 가족을 방문하고 의사와 상담하기 위해 한동안 프랑스를 여행했다.[172] 1978년 4월 14일, 그는 위독한 상태로 안타나나리보로 이송되었다.[172] 베펠라타나나 병원에 혼수상태로 입원한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1978년 4월 16일 일요일 늦은 오후에 사망했다.[172] 디디에 라치라카가 이끄는 최고 혁명 위원회는 그의 국민 장례식을 조직했다.[1] 장례식을 위해 모인 안타나리보의 많은 군중들은 그의 죽음 이후 일반적으로 지속된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애정을 증명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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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p. cit. Tome II
[166]
서적
op. cit. Tome II
[167]
서적
op. cit. Tome II
[168]
서적
op. cit. Tome II
[169]
서적
op. cit. Tome II
[170]
서적
op. cit. Tome II
[171]
서적
op. cit. Tome II
[172]
서적
op. cit. Tome II
[173]
웹사이트
Official results from the Madagascar Interior Ministry (in French)
http://www.mira.gov.[...]
2006-12-13
[174]
간행물
Philibert Tsiranana. In Encyclopédie Universalis. Universalia 1979 – Les évènements, les hommes, les problèmes en 1978
[175]
서적
Philibert Tsiranana, 1910-1978 premier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de Madagascar
Éditions L’Harmattan
[176]
웹사이트
Biographies des députés de la IVe République : Philibert Tsiranana
http://www.assemblee[...]
[177]
간행물
Philibert Tsiranana
Encyclopédie Universalis
2002
[178]
서적
op. cit.
[179]
서적
op. cit.
[180]
서적
op.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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